오스카 쉰들러의 2차세계대전 이후 이야기



(그림설명: 이스라엘을 방문하여 생존자들을 만난 오스카 쉰들러)

자신이 전쟁중 모은 돈과 수백여년간 집안에 전해내려 오던 가문의 전 상속재산을 투입하여 사람들의 소중한 생명을 구한 오스카 쉰들러는 1945년 5월 독일이 연합군에 정식으로 항복하기 전날 자신은 유대인들의 노동력을 노예같이 착취한 나치당의 멤버이기 때문에 잡히면 전범 재판을 받아야한다는 말을 한뒤 부인과 함께 차를 타고 도주하였습니다.

수용소에 남아있던 유태인들에게 자신이 마지막으로 가지고 있던 보드카 술병들을 유일한 재산으로 준 그는 고향인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숨어살기 시작하였고, 그곳에서 가명을 쓰며 영화 제작자로 활동을 하려한 쉰들러는 그의 과거 행적을 아는 체코계 옛 나찌들이 그를 멸시하고 협박하자 회사를 정리하고 아르헨티나로 도주하였습니다.

1949년부터 농부가 되어 농사를 짓기 시작한 쉰들러는 매년마다 한번씩 자신이 구해준 유태인들이 어렵게 벌어 보내준 돈으로 생활하였고, 쉰들러의 부인은 자신의 남편이 4백만 마르크가 넘던 어마어마한 전 재산을 다 써버린 사실을 알아낸뒤 별거에 들어갔습니다.



(그림설명: 1200여명의 이름이 적혀있는 쉰들러의 리스트)

1957년 평온하게 아르헨티나에서 살던 쉰들러는 신문과 방송등에 자신이 유태인들을 구원해준 이야기가 등장하자 주위에서 숨어 살고있던 전범들로부터 매일같은 살해협박을 받기 시작하였고, 농사일을 접어둔뒤 서독행 비행기를 타게 되었습니다.

쉰들러가 독일에 정착을 하였다는 소식을 듣게된 유태인들은 그가 전쟁전처럼 큰 공장을 운영할수 있게 투자를 해주었고, 대형 세멘트 공장을 운영한 쉰들러는 1961년 따가운 주위의 눈총으로 회사를 운영할수 없어 모든 사업을 그만두었습니다.

1961년 이스라엘의 모사드에게 잡혀 예루살렘으로 붙들려온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에 증인으로 참석한 쉰들러는 세계의 언론으로 부터 '천사'와 '은인'이라는 큰 찬사를 받았습니다.



(그림설명: 1962년 전범재판이 있기전 촬영된 쉰들러의 사진)

1962년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옳은 사람'이라는 칭호와 방송을 타게된 쉰들러는 그때까지 자신의 과거 행적을 모른 사업의 동업자등이 '당신이 그런 더러운 인간인줄은 몰랐다'며 등을 돌려 미국으로 이민을 가려 했지만, 그는 자신이 전범재판을 피했기 때문에 나치로 몰려 미국에 이민을 갈수없다는 판결을 받자 매우 심통해 하였습니다.

독일 정부가 직접 자신을 재판에 넘긴다는 소식을 듣게된 쉰들러는 전범재판에 불려진뒤 '민중앞에서 욕을 먹는' 벌을 받아 하루종일 프랑크프루트의 거리에 '나는 나찌였습니다'라는 푯말을 걸고 서있다 과거에 자신과 친분이 있던 나찌의 무리가 돌맹이들을 들고와 욕을 하며 돌팔매질을 해 머리등에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후 다시한번 전범재판에 불려간 쉰들러는 전쟁당시 그의 밑에서 일한 수용소의 SS 경비원등이 '쉰들러가 불에 달군 쇠막대로 재미로 유태인들을 지지고 마구 구타했다'는 가짜 증언 때문에 무기징역에서 사형을 선고 받을뻔 했지만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그는 집밖을 나설때마다 독일의 시민들이 욕설을 하고 죽인다는 협박을 하여 집안에서만 있다 1974년 혼자서 쓸쓸히 사망을 하였습니다.



(그림설명: 감사의 표시로 돌이 올려진 오스카 쉰들러의 무덤)

전쟁이 끝난뒤 쉰들러의 유언에 따라 텔아비브 근처의 공동묘지에 안치된 그의 무덤에는 지난 27년간 단 하루도 빼놓지않고 헌화가 들어오고 조문객들이 있어 공동묘지에서 가장 유명한 무덤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쉰들러가 전쟁중 구해준 1200여명의 유태인들은 오늘날 자손들이 4000여명으로 늘어났고, 그들은 항상 자신의 조상들을 구해준 쉰들러에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고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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